서울여성베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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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특별기고

아픈 몸과 노동

아픈 몸이라서 직장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말한다. 건강이 우선이지, 돈이 우선이야?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건강도 없다. 알다시피 소득이 적을수록 많이 아프고 일찍 죽는 시대다. 가난할 수록 질병 발병률이 높고, 충분한 치료가 어려우며, 적절한 생활 관리는 더 어려워진다. 가난하면 아프기 쉬운데, 아프면 노동 시장에서 탈락하고 더욱 가난해진다. 삶이 힘든 게 질병 때문인지 가난 때문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게다가 여성이 아플 때 이런 현실은 심화된다. 건강한 몸일지라도, 여성 노동자가 직장을 잃으면 더욱 별것 아닌 일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편이나 아버지가 먹여 살려주면 되는 존재고, 남편이나 아버지인 남성 노동자 대신 직장을 잃어줘야 하는 존재다. 심지어 1인 가구 여성의 경우 먹여 살려야 하는 가족이나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니, 더욱 쉽게 해고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먹여 살려줄 가족이나 아이가 있는 게 아니라서, 유일한 생계 부양자가 본인이라는 사실은 삭제된다. 이런 현실이니, 아픈 여성의 해고는 더욱 쉽고, 아픈 여성이 직장을 구하려고 할 때의 절실함도 마찬가지로 삭제된다.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여성들이 몸이 아플 때, 남성들과 달리 가사노동을 쉴 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점이다. 몸이 아픈 여성들을 인터뷰해보면, 몸이 아파서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를 꼽으라고 할 때 가사 노동을 꼽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프다는 것은 다양한 돌봄 노동을 받아야 하는 위치임에도 여전히 가족 안에서, 엄마 아내 딸로서 돌봄 노동을 포함한 가사 노동을 쉴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각자의 몸의 조건이 무시 된 채 사회적 역할과 의무만 강조되고 수행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 아픈 몸이 사는 세계

아픈 몸이라고 할 때, 전적으로 치료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가 있다. 반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아픈 몸이지만 지속적 치료나 관리를 병행하며 노동이 가능하고, 노동이 권장되며, 노동이 절박한 시기가 있다. 그리고 아픈 몸들의 상당수는 후자에 속한다. 의사들은 적절한 노동이 일상복귀와 건강 관리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말하고, 여러 통계는 적절한 노동이 회복과 건강 유지를 증진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몸이 아프면 병원비는 물론 생활 관리에 더 많은 지출이 생긴다. 아플수록 더 많은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직장이 절박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아픈 몸들이 직장에서 일하기 어렵다. 암 경험자들 상당수는 ‘암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서 목숨은 지켰지만, 일자리 지키기 싸움은 실패했다’고 말한다. 목숨 지키는 것보다 일자리 지키기가 더 어려웠다는 이야기다.

사회는 아픈 몸들이 질병과 ‘투쟁’을 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건강 중심 사회는 아픈 몸들에게 어서 빨리 건강한 몸을 복구하라는 요구를 할 뿐, 아픈 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기를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관심이 없다. 아픈 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기가 일시적일 수도, 평생일 수도 있지만 사회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픈 몸들을 쓸모없는 존재, 사회의 짐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아픈 몸의 삶에 대해 말해야 하나? 바로 아픈 몸들이다. 그러나 아픈 몸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는 사실 쉽지 않다. ‘질병의 개인화’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건강을 스펙의 일부로 만들었다. 아픈 것은 자기 관리 실패, 잘못 살아온 결과라고 낙인찍는 것에 익숙한 시대가 된 것이다.

누군가 아프다고 하면, 식습관이 나쁘거나 생활습관이 나빠서라고 한마디씩 하는 사회다. 누군가 위암에 걸렸다고 하면 짜게 먹는 습관 때문이고, 간암 걸렸다고 하면 자기 전 맥주 한 캔 습관 때문이라고 다들 한마디씩 ‘진단’을 한다. 식사 시간이 교대로 빠듯하게 주어지는 직장에서 비정규직으로 늘 긴장과 불안이 높다 보니, 빠르게 먹는 게 일상이 된 현실인 사람들이 흔하다. 가정의학과에서는 빠르게 먹으면 짜게 먹는다며, 식사 시간을 넉넉히 갖는 게 저염분 섭취에서 중요하다고 말한다.

일터에서 스트레스가 많지만 해소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친구를 만나거나 취미 생활을 즐기려 해도 모두 돈이고, 무언가를 할 시간도 여의치 않다. 일터에서 거의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유튜브를 틀어 놓고 맥주 한캔 마시는 한 시간이, 가장 저렴한 비용과 적은 에너지를 사용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다. 이 시간이 가장 편안하며 유일하게 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느껴진다. 수많은 통계는 가난한 사람은 돈도 시간도 부족해서 술과 담배로 혼자 스트레스를 푸는 비율이 높다고 말한다.

이처럼 우리의 생활 습관은 구석구석 우리 사회의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런 사회적 구조를 휘발시킨 채 개인의 ‘나쁜’ 습관만을 지적하며, 그로 인해 질병이 왔다고 지적하는 문화. 이는 구조의 문제를 전혀 손대지 않으며, 모든 것을 개인화시켜 개인에게 비난을 지우는 형태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 아픈 몸들은 자책감을 내면화한다. 자책감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사회의 부당한 대우에 대응할 힘을 갖지 못하게 하고, 불편 부당함 앞에서 침묵하게 만든다. 이렇게 아픈 몸들은 오랫동안 침묵하게 됐고, 불편부당한 현실은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다.

 

# 아픈 몸의 노동할 권리와 하지 않을 권리

이제 아픈 몸들이 자신의 노동할 권리와 노동하지 않을 권리를 말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몸이 아프게 되면, 질병이 곧 자신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불안 속에 오래 머물기도 한다. 사회에서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 취급하는 것 같고, 자아 정체감은 손상된다. 아픈 몸들에게 이런 느낌은 필연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 왜곡된 비참함 일 뿐이다.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있으며, 자신이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다는 감각 회복에 있어서 노동은 주요한 요소다. 물론 한국은 중산층이 빈곤층으로 이동하는 주요 이유가 질병일 만큼, 의료비용이 비싸고 복지망이 부재한 사회이니, 생계와 생존을 위해 아픈 몸들에게 노동이 중요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아픈 몸에게는 노동을 할 권리와 하지 않을 권리 모두 필요하다. 아픈 몸이 노동할 권리와 노동하지 않을 권리를 모두 누리게 된다면, 이는 아픈 몸들에게만 이로운 게 아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도 자신 몸에 맞는 노동을 요구할 권리가 확장된다는 의미다. 생산성 중심으로 구획된 직장의 노동 환경이 노동하는 이의 몸에 맞는 환경으로 변화된다는 의미다. 혁명적인 현실이 형성된다는 의미다.

 


조한진희(반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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