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성베테랑
Leave a comment

[4호] 〔기획연재〕 펭귄어패럴 대화록 #3

공단서점 가는 길

나는 명자언니에게 궁금한 것들이 참 많다. 펭귄어패럴에서 시작된 그녀와의 대화는 언제나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 늦어 언니를 집에 바래다주던 길이었다.

 

신소우주: 명자언니, 가리봉 오거리에 있던 ‘공단서점’에서 읽었던 책 중에 제일 기억나는 책이 뭐예요?

강명자: 잉. 나는 광민사에서 나온 ‘노동의 철학’이라는 책이 제일 기억에 남아.

 

그녀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노동의 철학’이라. 늘 그랬듯이 명자언니는 나를 어딘가로 이끄는 ‘단서’를 던져줬다. 나는 종종 언니와 사람들에게 ‘명자언니는 저의 페르소나예요.’ 라고 말하곤 한다. 대화를 통해 언니가 던져주는 ‘단서’들은 내가 살아가며 작업을 이어나가는 지침이 되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노동의 철학」이라는 책의 내용이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상상만 하기엔 그 이름이 너무나도 거룩했다. 이 책을 꼭 구해서 읽어야겠다 생각했다. 여기저길 뒤지다 어느 인터넷 중고서점에서 노란색 표지가 선명한 「노동의 철학」(광민사 엮음,1980)을 발견했다. 오래되어 색이 바래고 시큼한 냄새가 나는 한 권의 책은 그렇게 내 앞에 펼쳐졌다. 내가 태어난 해에 출판된 이 책은 딱 나만큼 나이를 먹은 동갑내기 친구였다. 처음 만났지만 명자언니의 기억이 통로가 되어 오래 전부터 곁에 두고 지내던 듯 친근했다. 그렇게 나는 「노동의 철학」을 또박또박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책의 내용은 놀라웠다. 40년 전에 출간된 책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진보적이며 때로는 그 진보를 넘어섰다.

맹목적으로 비판의 자유 없이 무엇인가를 믿는 것은 종속입니다. 받아들여서 하는, 또한 복종해야 하는 이유를 납득하고서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것은 종속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은 신념에 도달하기 위한 길입니다. 이 정신 앞에서는 비판할 수 없는 권위란 것은 없읍니다. 의심할 수 없는 것도 없읍니다. 사람들이 독립된 인격인 한 이유 없이 믿어야만 하는 것은 없고 따라서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없읍니다.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또한 자기 자신도 의심받는 존재인 것을 의미하고 있읍니다.

-「노동의 철학」제1장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라 中 ‘모든 상식에 의심을’에서 (p.10)

 

나는 이 책을 명자언니랑 같이 읽고 싶었다. 구로공단 시절, 언니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생각들 그리고 40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언니가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어떤 생각들을 할지 궁금해졌다. 또한 그녀의 생각들과 나의 생각들을 주고받고 싶었다. 그리하여 2018년 ‘펭귄어패럴, 그 여름 한 철의 이야기’에 이은 두 번째 프로젝트가 2019년 ‘펭귄어패럴 컬렉션 「노동의 철학1 : 일자박기 연습시간」’이란 이름으로 탄생했다. 역시 명자언니는 나의 페르소나! 꾸준히 지속해온 ‘일자박기 연습시간’이라는 행위는 나에게 있어 하나의 ‘노동의 철학’이었기 때문에 지난 과거의 ‘단서’를 언니와 내가 함께하고 있는 현재의 시간으로 소환해내는 주제로써 꽤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펭귄어패럴 컬렉션「노동의 철학1 : 일자박기 연습시간」(신소우주 엮음,2019)

그렇게 우리는 2019년의 펭귄어패럴에서 1980년의 「노동의 철학」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몇 명 늘었다는 것이다. ‘강명자’와 ‘신소우주’라는 둘 만의 관계를 조금 더 확장해보고자 함이었다. 좋은 친구에게는 또 다른 좋은 친구를 소개시켜주고 싶은 법이니까. 그리하여 강명자의 친구인 ‘권영자’ 그리고 신소우주의 친구인 ‘안수연’, ‘민경은’, ‘송지은’이 동참하게 되었다.

명자언니처럼 구로공단 대우어패럴의 미싱사였고 지금은 면생리대를 만들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영자언니, 제주도에 살게 되면서 곶자왈에 대한 사진을 찍고 있는 수연언니, 부천의 이 동네 저 동네를 옮겨 다니면서 ‘여러가지 연구소’라는 공간을 운영하고 있는 경은씨, 갑자기 몸이 불편해진 동반자의 곁에서 씩씩하게 삶의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지은씨. 이 여성들은 기꺼이 명자언니와 나의 초대에 응해주었고 우리의 대화를 더욱 깊고 넓게 만들어주는 사랑스런 협업자가 되어주었다.

권영자: 내가 아파서 직장을 그만두면서 그때 나한테는 소속감이 굉장히 중요했어. 그리고 언니들하고 얘기하면서도 언니들이 일을 하다가 몸이 아파서 집에 있다 보니까 너무 무기력해지고 우울증이 오고 이런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게 소속감이 없어서. 주기적으로 일을 했던 사람들은 일을 하고 움직였던 그 시간대가 없어져 버리니까. 그게 나는 개인적으로 너무 힘들었던 거야. 10년 동안. 내가 정말 우울하다고 표현했을 때 누구 하나 공감해주는 사람들이 없었고. 요즘은 이제 나와서 나름 뭔가 하면서 움직이고 있잖아. 나와서 마음만은 정말 행복하고 좋다는 것들이 느껴지는 거지. 함께 하는 그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무기력하고 이런 속에서도 뭔가 나를 다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뭐든지 끊임없이 했어. 생리대도 만들고 손바느질도 하고 화장품도 만들고 효소도 담고 뭐 할 수 있는 거는 다. 아무튼 내 나름대로 만족을 하고 있었고 그것을 또 나누고 이러면서 거기에서 오는 즐거움들. 내가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다치지 않으려고 부단하게 노력했어.

안수연: 곶자왈 작업을 하는데 이게 사실은 컬렉션이야. 나무들 하나하나를. 마음에 드는 나무. 마음에 와 닿는 나무를 찾아서 포트레이트를 찍고 있거든. 그래서 걔네들을 모아서 보여줬을 때의 느낌과 울림은 어떨까. 그게 맥락이거든. 전체 숲을 찍고 있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나하나를 모아서 보여주는 컬렉션이라는 게 가장 평화롭고 누구한테 푸쉬하지 않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어.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 나무가. 안정감을 주는 거지. 뭔가 반응을 바로 하지 않고 조금 관찰한다고 해야 되나. 약간 여짐이 있는 거지. 딱 주고받고 바로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고 줘서 받았는데 그거에 대해서 혼자서 좀 생각도 하고 관찰도 하고 되씹는다고 해야 되나.

민경은: 사람들이 내가 사교적이지 않다 그러면 되게 의아해 하는데 나를 오래 만난 사람들은 알아요. 근데 이삽심 대에는 사교적으로 뭔가 썼던 그 약발이 나도 이제 내 본성에 가까워지면서 닳아 없어지는 거죠. 내가 관계를 만들어간다는 말을 이해하는 방식이 뭐냐면. 내가 누군가를 아는 만큼 또 누군가가 나를 알아가려고 하고. 사실 난 이게 되게 공평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보통 일하다보면 그런 관계가 없잖아요. 그거와 맥락을 같이 해서 공간을 예전보다 한 4분의 1 정도로 확 줄여버리게 된 게 그런 거 같아요. 정말 많은 이에게 열려있지 않고 아주 소수에게 열리는 작업실 성격을 가져가게 되는 거 같아요. 그래서 내가 공간을 기획하면서 ‘아 내 정체성이 지금 이렇구나,’ 라는 게 더 많이 확실해졌어요.

송지은: 메이킹은 인위적으로 만드는 건데 정말 창조한다는 것은 무에서 유로 가는 행위라고 했을 때 재활의 과정이 남편의 마비된 몸이 움직여 가는 게 예술의 행위랑 굉장히 닮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굉장히 많이 해요. 그래서 흥미로웠어요. 그런 것 하나에서도 예술과 연결을 하게 되는 게 직업병인지 뭔지. 내 직업 내 일에 대한 애착이 강한 아이라 내가 생각하기에 내 입장에서 이게 예술적 가치가 없다고 했으면 솔직히 재미없어 했을 거예요. 솔직하게 얘기해서. 내가 남편과 결혼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서로가 자신의 것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서로 일에 대한 리스펙을 한다는 점에서 좋은 동반자라고 생각했던 지점이고. 그거는 현대에 여성이 자기 직업을 평생 영위하기 위해선 너무나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했고. 그 어떤 희생도 사실 하고 싶진 않다고 생각했어요.

– 펭귄어패럴 컬렉션 「노동의 철학1 : 일자박기 연습시간」(2019) 中 대화록 발췌

 

펭귄어패럴의 여성 협업자들

작년 한 해, 펭귄어패럴의 테이블에 둘러앉아「노동의 철학」이라는 책 한 권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생각을 나눴던 우리들은 올해 어딘가 같이 가야할 곳이 생겼다. 명자언니가 「노동의 철학」을 처음 만났던 그 곳. 바로 ‘공단서점’이다. 8,90년대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이 세상의 감시를 피해 드나들었고 인근 공장 노동조합의 소식지들이 오고가기도 했던 ‘공단서점’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장소이자 공간이다. 하지만 대우어패럴의 미싱사였던 명자언니와 영자언니는 우리와 함께 「노동의 철학」을 다시 읽어나가며 지금 여기에서 굳건히 존재하고 있다. 아마도 ‘공단서점’을 기억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그러할 것이다. 펭귄어패럴의 여성 협업자들에게 있어 2020년의 ‘공단서점’은 어떤 의미가 될까. 가보지 않았으니 아직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그 과정의 길을 함께 걸어갈 것이라는 생각만으로도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강명자: 내가 ‘공단서점’을 가게 된 계기는 사실은 노동조합 위원장 때문에 맨 처음 같이 갔던 기억이야. 그전에는 내가 날나리라고 그랬잖아. 내가 학생 출신이 아니어서 이런 책방에 가서 단 한번이라도 책을 사서 읽어본 적도 없고. 예전에는 일 끝나면 걸음마 나 살려라 줄행랑쳐서 고고장이나 음악다방을 갔던 발걸음들이 이제 ‘공단서점’으로 향하게 되었지. 사람은 어떤 계기를 통해서 변화가 되는 거잖아. 사람이 변하면서 문화도 바뀌더라고. ‘공단서점’은 유일하게 사회과학서적을 볼 수 있었던 하나의 공간, 장소. 내 기억은 그래.

신소우주: 그곳이 갖는 그런 상징성이 굉장히 크다고 생각해요. 언니가 「노동의 철학」이라는 책을 ‘공단서점’에서 읽었다고 말씀해주셨을 때부터 저는 이걸 프로젝트로 하고 싶었어요. 저는 가리봉 오거리 쪽을 지나다닐 때마다 항상 꼭 봐져요. 거기가 ‘공단서점’ 자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펭귄어패럴 대화록 #1: 펭귄어패럴, 그 여름 한 철의 이야기
펭귄어패럴 대화록 #2: 일자박기 연습시간
펭귄어패럴 대화록 #3: 공단서점 가는 길

 


 

신소우주

저는 펭귄어패럴의 초보 미싱사입니다. 미싱이란 저에게 예술 작업으로써의 매개인 동시에 불안한 미래를 준비하는 생계의 기술입니다. 펭귄어패럴에서 매일 매일 연습시간을 보내고 한 명 한 명 개인을 만납니다. 그 시간과 만남이 맺어 준 관계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와 주고받는 대화를 기록합니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